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 === 한편 이괄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한명련은 붙잡혀 압송되고 있었으나 이괄이 구출해내어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반대로 함께 이괄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은 안주 목사 정충신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군무지를 이탈, 도원수부에 합류해 토벌군의 선봉에 섰다. [[반란]] 초기에는 변변한 [[전투]]가 없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임금님 옆 [[간신배]]들을 몰아내자.'는 식의 주먹구구식 궐기였으니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괄이 택한 전략은 빠른 전격전이었다. 이괄 군은 토벌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회피하며, 철저하게 산속 오솔길만을 통해 진군했으며[* 나중에 정충신의 관군이 [[이괄]] 군의 진격로를 따라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이 말 그대로 절벽을 타고 벼랑에 매달리는 엄청난 악조건이었다. 결국 추격군은 전부 녹다운되어 지쳐서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만큼 [[인조]]가 [[이괄]]에게 맡긴 군대는 조선 최강의 강병이었고, 나머지 장수들이 이끌어야 했던 군대는 포졸 수준의 약한 병사들이었다는 뜻이다.] 관군이 징발되어 비어 있는 고을들을 빈집털이하여 쌀과 군수품을 노획하는 식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은 [[녕변군|영변대도호부]]의 관아를 점령하고 [[영변행궁]]에 처들어가 행궁 내부의 [[무기고]]속 무기를 탈취하였다. 하지만 이괄 군이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투항해버렸고, 한명련의 옛 부하들 역시 투항한 데다가 이괄의 중군 이윤서 등이 병력을 이끌고 이탈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숫자가 많이 줄었다.[* 이괄의 중군이었던 이윤서의 투항이 결정적이었다. 이윤서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심복들과 이괄을 제거하려다가 실패, 대신 휘하에 이끄는 군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장만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직후 죄책감을 느끼고 자결했다. 이윤서의 희생으로 그의 가문은 안위를 보전받았고 이윤서도 사후 공신에 추증된다.] 그러나 [[장만]]이 자만하여 정찰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결국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덕분에 이괄의 난 직후 장만은 책임지고 형식상 잠깐 백의종군하기도 한다.] 심지어 "애초에 장만이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 됐는데 일을 키워놓은 작자가 역적 토벌 공신이라는 것이 황당하다."라는 사관의 기록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